HEAVENKISSING

# Miro:藍

"이제 네 차례야. 준비해."

 

한참 멍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내키지 않는 지시를 듣고 엉거주춤 반쯤 일어났다. 괜히 기지개도 펴보고 하품도 해본다. 솔직히, 이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고민있어? 생각이 많아 보이는데."

 

그렇게 티가 나? 잡생각 버리고 빨리 준비나 하라고 하는 거야. 한때는 아주 친밀했던 그들도 언젠가부터 이런 대화로 상대방을 떠보게 되었던거 같다.

 

내가 했던 생각은, 당연히 지금도 전에 없이 진지하게 통화 중인 '그들'에 대해서였다. 물론 휴대 전화의 주인은 보통 한 대에 한 사람이지. 하지만 293일 전부터 거의 또다른 주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나타났었다. 그는 맨발로 모든 것을 부수고 그의 마음에 들어와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겼다. 주인은 그 공격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항복해버렸다.

 

아마도 달콤한 항복이라 행복했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핸드폰 비밀번호를 공유하고, 사진 앨범의 사진들을 같은 클라우드에 업로드했고, 짧은 영상을 찍어 재미있는 그래픽을 합성하며 지냈다. 

 

"...오늘로 293일 맞지?"

"맞아."

 

커플 캘린더 어플리케이션을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건 나뿐인 줄 알았는데. 나의 동료도 무심한 거 같으면서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가장 많은 통화를 하는 상대이긴 하다. 가족과도 무심하게, 친구와도 까칠하게 통화를 하는 주인은 그에게만은 다정했다. 

 

언제나 내 차례를 기다릴 때는 바뀐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몇 번 있었던 일이지만, 풋사과 같은 어리숙함도, 짧은 생각에서 나오는 가시 같은 말도 이번의 경우에는 없었다. 전과 달리 성숙하게, 유독 달라 보이는 그 느낌이 낯간지러우면서, 사실은 좋았다.

 

"뭘 그렇게 죽상이야?"

 

내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더 좋았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제는 다시 없을 거 같은 추억에 회상하는데 잠깐만 하면 되면서 얼굴이 굳었다고 그저 자기가 제일 힘든 줄 아는 다른 동료가 웃음을 강요한다. 나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나를 보며 쯧쯧거리더니, 처음엔 별로 바쁘지 않았는데, 200일이 지날수록 바빠진다며 또 다른 동료를 붙잡고 한탄하며 떠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빨리도 마음이 변하는건지."

"100일 넘긴 것도 기적이야. 전에는 50일도 있었잖아."

"그때는 굉장했지. 주인이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안 받았는데."

"그래, 그때 내가 잠도 못자고 새벽 3시니 4시니 하는 시간에도 불려가고."

"네가 안 갈 수가 없잖아. 상대방이 전화를 안 받는데."

 

'부재중'이 얼마나 힘든데! 누구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이다. 그래, 그 마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특히나 돈독한 사이의 부재중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괜한 상상을 하고 상상은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결국 화를 부르기 마련이었다. '부재중'은 그 마음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결국은 혼잣말로, 한숨 소리로, 불안정하게 책상을 타닥타닥 치는 소리로 나타나기 때문이었고 우리는 그걸 전부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걸 이해한다. 

 

이해하지만...오늘만큼은 솔직히, 내가 더 힘들다고 대놓고 말하고 싶다. 

 

"준비 안해?"

"...잠깐만 있어봐."

 

어쩌면 아직 안 끊을지도 모르잖아. 모두가 날 주목했고 나는 어색하게 변명같은 말을 했다. 내가 변명할 일이 아닌데도 그렇다. 방금 목소리 들었어? 마음이 좀 약해진 거 같잖아. 어쩌면 용서할지도 몰라. 좀 더 이야기 나눠보고 좋았던 기억이 떠오를지도 몰라. 124일째의 날에 새벽 1시의 통화 기억해? 그때도 싸우다가 결국 둘이 울어버렸잖아. 그리고 서로 울먹이면서 잘 들리지도 않은 쉰 목소리로 약속했잖아. 좀 더 잘 해보겠다고. 이번에도 어쩌면 그냥 그런 일일지도 몰라. 좀 더 시간이 지나 500일쯤에는 그때 이런 전화가 있었는지도 잊어버릴거야. 그도 그럴게 통화 목록에도 없을 아주 오래된 일이 될거잖아. 안그래?

 

"아니야."

"진짜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부정을 해?"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괜시리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모든 전화는 언젠가 끊어야 하고, 이건 네가 언제나 하는 일이야. 원래 그런 거라고. 알았어? 이번 건에 특별히 미련을 두지 마."

 

냉정한 동료가 핀잔처럼 맞는 말을 했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미련이 있다. 너무 많은 미련이 있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언젠가부터 같이 사진을 찍는 일이 적어졌다. 전화보다는 메세지 어플을 통해 연락하는 일이 늘어났다. 같이 먹는 외식의 카드 결제 문자가 날아오지 않는다. 혼자 시키는 배달음식의 가격 15,000원과, 편의점에서 산 맥주 4개입 10,000원의 결제 문자가 아주 많이 잦아졌다. 그렇게 '부재중'이 일을 더 많이 하면서 나는...예감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항상 내가 맨 마지막이잖아."

 

나는 그 통화를 다 듣고 있어야 해. 그게 너무 괴로워. 나는 전에 없던 하소연을 했다. 처음의 어색한 통화부터 너무나도 행복하게 나눴던 통화까지 그 마음이 익어가는 걸 내가 다 들었다. 애매하게 신경을 긁는 대화가 늘어나면서, 내 마음이 제일 불안했다고.

 

"너무 감정이입하지마. 네 잘못도 아니고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닌데."

"하지만, 하지만 내가 해야 하잖아."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면서도 나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이 일은 역시 너무 힘들어.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좋을지도 몰라. 나 이거 그만할래. 꼭 술 취해서 주정을 부리면서 전화를 하는 주인마냥 계속 헛소리를 해댔다. 

 

아, 정말로 가기 싫어. 나도 하기 싫어.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영원하면 좋겠다.

둘이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즐거운 이야기나, 시덥잖은 농담이나 나눴으면,

꾸벅꾸벅 졸면서도 전화를 끊기 싫어서 그대로 켜놓고 잠들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래 준다면 나도 이렇게 힘들지 않을텐데, 얼마든지 웃으면서 일할 수 있다. 새벽이든 언제든 일해 줄 테니까. 전화를 짧게 걸었다 끊는 걸 반복해서 내가 아주 많이 나가도 좋으니까. 그냥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 

 

그래. 얼마든지 전화를 끊어도, 다시 걸 수 있는 사이니까.

 

아니면 적어도 휴대 전화를 바꿀 때까지만 그냥 좀 사귀어주라, 제발!

 

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고 동료들은 방송실에 나를 던지듯이 욱여넣었다. 망할 놈들. 

 

[그만 끊을게.]

 

저 너머 무거운 목소리가 기어이 그 말을 하고 만다. 그걸 듣는 주인은 어떤 얼굴일까, 아무런 말이 없고 떨리는 숨소리만 울린다. 나는 반쯤 울먹이면서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르는 같은 노래. 평소에는 짧게 부르면 그만인 일이 지금은 이렇게 힘들다. 아마도 그는 오늘의 내 노래를 아주 오래 들을 것이다. 듣는 일을 절대로 멈출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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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1 ) 예전에 홈페이지에 올렸던 '소리에 자아가 있었으면 좋겠다'썰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첨언 2 ) 다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최근의 휴대전화는 통화를 종료할 시 전화기와 같은 신호음이 나지 않고 그냥 소리가 없거나 짧게 소리나고 끊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용을 바꾸거나 배경을 훨씬 과거로 바꾸거나, 하여간 리뉴얼이 필요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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